05. 해명 by rwine

 아인과 같이 지낸 지 어느새 일주일이 됐다. 그를 계속 살펴보지만,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하루에 한 번 책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너무 열심히 일해서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이야."

 며칠 전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걸 이렇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지 정확하게 설명을 못 해서 질문도 거기서 끝났었다.

 사실은 요 며칠 새 일을 하느라 바빠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며칠 쉬었더니 일이 많이 밀려서 집에 들어오면 밥 먹고 잠만 자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집안에 일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들어올 때 깨끗한 집을 보는 게 묘하게 기분은 좋았다. 예전에는 집에 들어오면 할 일이 잔뜩 쌓인 걸 보는 게 힘들었는데….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몇 번 다쳤을 때마다 아인이 치료를 해주었다. 그의 치료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난 상처까지 치료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원리로 하는 건지 의문이라 물어보니 '그냥 흔한 마법이야. 마법은 본 적이 없구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데로 나는 마법은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하고 넘어갔다.

 오늘은 밀렸던 일을 다 해결하고 겨우 쉴 시간이 생겼다. 눈이 저절로 떠졌는데 시계를 보니 아침 9시다. 침대에서 더 뒹굴뒹굴하고 싶어서 그러고 있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여니 아인이 앞에 서 있다.

 "아침인데 뭐라도 먹을래?"

 그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그런데 내가 깬 지는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방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놓은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항상 다정하게 대한다. 이제 만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대체 왜 이렇게 대하는 건지 그를 볼 때마다 의문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한다.

 "…. 저기, 아인?"

 "왜 그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나랑 만난 지 이제 일주일째인데, 당신이 하는 걸 보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같아요."

 그는 나의 말을 듣더니 고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표정 변화도 없이 말한다.

 "그거야 네가 너무 고생만 하며 살았으니까."

 "…. 그건 내가 불쌍하다는 말이에요?"

 "….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그의 표정이 조금 변한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느낌이다. 나는 다그치듯이 말한다.

 "내가 왜 불쌍한데요?"

 "아니, 잘못 말했어. 너를 불쌍하게 여기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나를 조금은 이해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야."

 그가 말을 돌리는 것 같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말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 해줘요. 내가 불쌍해요?"

 "그건…. 진, 네가 혼자서 살아온 걸 보니 안쓰러워서…."

 말을 더듬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를 보자니 왠지 짜증이 난다.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을 싫어하는데, 또 그런 시선을 받는다니….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떻게 나 혼자 살아온 걸 아는 건지다. 역시 내 과거를 봤다는 말은 사실인 걸까?

 "내가 혼자 살았다는 건 어떻게 안 거죠?"

 "얼마 전에도 말했지만 봤으니까."

 "대체 내 과거를 어디까지 아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건 다 봤어. 의도한 건 아니지만 과거를 본 건 미안하게 생각해."

 이건 그가 이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의도는 없었다지만, 남의 과거를 봤다는 걸 아는 건 기분이 좀 이상하다. 왠지 보이면 안 될 걸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건 뭐예요?"

 "말 그대로야. 너의 집에 들어온 날, 밤에 기억이 흘러들어 왔어."

 "…. 무슨 사이코메트리라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아니, 그거와는 달라. 물건을 건드려서 읽는 거라면 단편적인 기억만을 알아야 하잖아? 그러니 이건 근본적으로 다른 거야."

 그러고 보면 그의 말대로이다. 사이코메트리는 물건에서 아주 단편적인 기억만을 읽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그런 능력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니, 그럼 도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남의 과거를 다 읽은 거야?

 "대체 당신, 정체가 뭐예요?"

 "그러니까 기록자라고 말했잖아."

 "그건 대답이 안 되잖아요. 더 정확하게 말해달라고요."

 그러자 아인은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 하는 것 같다. 얼굴이 찌그러지는 게 깊이 고민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일단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한다. 이윽고 그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급하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보니 가브리엘 님께서 너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그랬죠. 그런데 그건 왜요?"

 "가브리엘 님이라면 네가 이해 가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거야."

 이게 그가 떠올린 해결책인가? 그러고 보면 연락처도 받아놨으니 뭐라도 이해가 되게 설명을 해주려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아무래도 직접 연락을 해봐야겠다. 나는 바로 전화를 찾아 받아뒀던 번호로 문자를 보낸다. 연락을 바로 줬으면 좋겠지만 내 희망 사항이겠지. 아무튼 기다려봐야겠다.

 "궁금한 게 많은 건 좋지만, 일단 뭐라도 먹는 게 어떨까? 성장기에 잘 먹는 건 중요해."

 그 말에 시간을 다시 보니 9시 반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게, 마치 내 보호자인 것 같다. 성장기라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직접 들으니까 뭔가 반항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차려준다는 정성이 있으니까 먹어야겠지?

 "그럼 먹을게요."

 식탁 앞에 앉으니 그가 토스트와 달걀프라이를 내놓았다. 아침이라고 가볍게 내준 모양이다. 그걸 말없이 먹고 있자니 갑자기 휴대전화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식기를 내려놓고 얼른 방으로 가서 전화를 보니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다. 일단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표식이 새겨진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까?"

 휴대전화 너머로 어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말하는 걸 보면 편지를 보냈던 가브리엘이 맞는 것 같은데, 그가 이런 어린아이인가? 전화를 받자마자 순간 당황해서 말을 멈추자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제가 가브리엘입니다."

 "…. 가브리엘?"

 "네. 아무래도 제 목소리 때문에 놀라신 모양이군요."

 "네, 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한다. 목소리만 들어보면 나보다 훨씬 어린아이인 것 같은데,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죠. 우리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아, 네."

 "주소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내일 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 알겠습니다. 내일 보죠."

 그는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왔는데, 만날 시간과 주소가 적혀있다. 시간은 오후 2시, 주소는 어딘지 몰라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우리 집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아무래도 내일 그를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다시 방을 나오니 아인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식탁에 다시 앉으며 이야기를 한다.

 "내일 만나기로 했어요. 같이 갈래요?"

 "응. 오랜만에 봬야지."

 "오랜만? 대체 언제 만났던 거예요?"

 "그러니까…. 160년 전?"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은 어린 것 같던데, 그를 160년 전에 만났다는 게 말이 되나? 아마도 5년 전쯤에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또 말이 안 되는 게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단 말이지? 아무튼 내일이 되면 뭔가 알지 모르니 이건 그만 생각해야겠다.

 …….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고 약속한 시각이 됐다. 우리는 산속에 있는 저택의 앞에 서 있다. 저택은 앞의 정원과 외관이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내가 앞서서 정문에 다가가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알림음이 크게 울린다. 조금 기다리니 어떤 여자가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검고 윤기 있는, 긴 머리카락이 슬쩍 흘러내리는 것이 인상적인 미인이다. 외모만 보자면 나이는 10대 후반으로 생각되는 그녀는 웃으며 우리를 반긴다.

 "아, 수민이가 말했던 사람이구나? 어서 오세요."

 수민이? 그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도 일단 고개를 가볍게 숙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허리를 숙이는 아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게 보인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이니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동생이 말해줬거든요. 얼른 들어오세요."

 동생이라고 하는 것 보니 이 사람은 누나인 모양이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따라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인다. 그녀는 우리 앞에서 안내한다. 아인은 내 뒤를 따라오며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저는 류수아라고 해요. 당신이 아는 이름이라면…. 제루엘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제루엘이라면 편지에 적혀있던…."

 "맞아요. 힘의 신이죠."

 이 여자도 똑같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같은 패거리인 모양이다. 일단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무표정으로 있으려 노력한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아무래도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격인 것 같다. 그녀의 말을 들어넘기며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어느 방 앞에 도달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문을 여니, 거대한 서재가 눈에 들어온다. 벽 한 면을 차지하는, 내 키보다 큰 책장에는 책이 한가득 꽂혀있다. 그 책장 앞에는 큰 갈색 책상이 놓여있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는 한 소년이 앉아있다. 잘 봐줘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인데 저 애가 가브리엘인가? 소년은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제가 가브리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선우진입니다."

 묘하게 긴장을 하게 만드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며 인사를 한다. 슬쩍 옆을 보니, 아인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소년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넨다니, 남이 보면 굉장히 이상해 보일 것 같다. 자신을 가브리엘이라 칭하는 소년이 먼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계속 일어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뭐하니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아, 네."

 우리가 책상 앞에 놓여있는 소파에 앉자, 소년도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긴다. 나는 그 소년을 빤히 살펴보았다. 머리카락은 잘 정돈된 검은색에 전체적으로 순하게 생겼는데 묘하게 눈만은 날카롭다. 생긴 건 미소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옷은 잘 정돈된 흰 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 그렇게 소년을 계속 보고 있자니 그가 먼저 말을 건넨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진 씨."

 "아…. 제 성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죠?"

 보통 내가 이름을 말하면 성을 따로 한 번 더 말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소년은 이름을 단박에 알고 부른다. 그게 신기해서 그에게 되물어보았다.

 "그 정도도 눈치 못 채면 신의 이름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가브리엘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저 정도면 자의식 과잉이 아닌가 싶지만, 그에게는 당연한 일인 모양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실 테니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 그럼 당신이 신이란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그것부터 알려주세요."

 솔직히 다른 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제일 먼저 할 말은 이것인 것 같다. 이 소년이 신인지 아닌지 그걸 먼저 증명하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도 믿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 소년은 말없이 오른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검은 구체가 생긴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소년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검은 구체의 안에서 무언가 휘몰아치더니, 그 구체 안에는 별빛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지금 차원을 새로 만들고 있습니다."

 "차원을…?"

 "이 차원은 제1차원보다 시간이 약 30억 배 빨리 흐르게 해두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지금의 차원 수준과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까 행성들이 생겨나고 그곳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장시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보니 한 행성 표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거 같다.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찡그리고 보고 있자니, 소년이 왼손을 구체 근처에 가져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 행성이 크게 보인다. 그 행성의 위에는 건물들이 아주 많이 생겼다, 없어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다가 불빛이 번쩍이더니 건물들이 무너지고 작은 비명이 들려온다. 어느새 행성 위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황폐해져 있다. 다시 눈을 깜박이니 이제는 행성들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며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이 새까만 구체만이 그의 손 위에 존재한다.

 "이건…."

 "차원의 멸망입니다. 30억 배로 시간을 돌렸더니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죠?"

 가브리엘은 자신의 손 위에 있는 그것이 차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잖아. 이런 건 환영술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이런 말을 꺼내자 소년이 순간 흠칫하는 걸 봤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될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말대로 이런 건 환영으로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이런 거 말고 더 확실한 증거는 없나?"

 "….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소년은 손에 있던 구체를 쥐어 없애고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입을 연다. 이윽고 그가 말을 시작하자 주변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소년의 주위는 거울이 깨지듯 부서져 내린다. 나는 점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손에 무언가 느껴져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아인이 걱정을 하는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있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것이 멈추지 않는다. 그가 말을 멈추자 깨지던 주위는 점점 돌아가기 시작하고 내 몸도 떨림을 멈춘다.

 "이, 이건 대체…."

 "이게 신의 언어입니다. 웬만하면 당신에게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아니면 증명할 수가 없을 것 같더군요. 인간은 신의 언어를 들으면 공포를 느끼게 돼 있으니까요."

 직접 들으니 이해가 가는 느낌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공포…. 단지 말을 하는 걸 듣고 있을 뿐인데 무서워서 몸이 절로 떨렸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할 것 같다. 아인은 옆에서 계속 내 손을 잡아준다.

 "이제 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면 다른 걸 보여드려야…."

 "아, 이제…. 됐어요."

 목이 떨려서 말을 절로 더듬는다. 가브리엘은 그러면 됐다면서 다시 말을 이어간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니, 제가 보냈던 편지도 믿으실 수 있겠군요. …. 저를 믿듯, 아인을 믿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의 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린다. 아인이 옆에서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자신을 믿지 않아 주는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봐 신경 쓰고 있었다던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가만히 있자니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난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갑옷을 입은 사람이 쟁반에 주전자와 찻잔들을 받쳐 들고 들어온다. 그러더니 소파 앞에 있는 탁자에 그 주전자와 찻잔들을 차례로 놓는 것이다.

 "…. 이 사람은 누구죠?"

 "우리 집에서 일하는 자동 갑옷입니다. 안에 사람은 없어요."

 소년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갑옷을 부르더니 갑자기 투구를 들어 올린다. 그러자 속이 텅 비어있는 게 보여 나는 깜짝 놀라 순간 흠칫한다. 가브리엘이 다시 투구를 얹으니 갑옷은 천천히 방을 나간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소년이 주전자를 들더니 내용물을 찻잔에 따른다.

 "차라도 한잔하세요. 홍차로 준비했습니다."

 대체 여긴 어떻게 된 곳인지 의문만 가득하다. 하지만 입을 닫고 따라준 홍차를 삼킨다.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차를 들이켜느라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렇게 홍차만 마시고 있자니 가브리엘이 말을 건넨다.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인은 어떻게 보면 제 동생 같은 존재니까…. 저도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거든요."

 신은 팔이 안으로 굽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만 아까 그 떨림이 떠올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아까 그 말을 다시 들을 것 같다. 이런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아까 그것 때문에 겁을 먹으신 모양이군요. 이대로는 아무 말도 못 하실 것 같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 네."

 나는 얼른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어서 짧게 대답하고 바로 일어선다. 그러자 가브리엘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빠르게 저택을 벗어나 현관 앞에 서자 소년이 다시 말을 한다.

 "오늘은 제 마음대로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음에 한 번 더 들려주세요. 저는 언제 오시든 환영하겠습니다."

 "…. 네."

 대답 한마디를 겨우 하고 돌아 나선다. 아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받쳐주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 게 잘못이었던 걸까. 아무래도 진이 지식의 신을 보고 겁을 많이 먹은 모양이다. 오는 길에 아무 말도 없었던 게 증거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나서는 것도 주제넘은 짓인 거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무언가 말을 해주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그가 조금은 겁을 먹지 않고 다가설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후회를 해도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번 일로 멀어질지도 모르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그래야지 내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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